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문단 편집) == 배경 == 1894년 [[동학 농민 혁명]]이 벌어진다. 농민 운동의 기세가 거세져 조선의 자체적인 군대로는 막지 못하게 되자 조선은 청나라에게 지원을 요청했고, 청나라는 아산만을 통해 2,800명의 병사를 파병하고 톈진 조약에 따라 일본에게 파병 사실을 알렸으며, 일본은 일본 거류민과 공사관을 보호하기 위해 일정 정도의 병력을 주둔시킬 수 있다는 제물포 조약 조항에 의거하여 8,000명의 병력을 인천만으로 파병했다. 정작 양국의 파병 명분으로 쓰였던 농민군은 외국 군대가 들어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외세에 빌미를 주게 될 것과 그로 인한 궐기 목적의 변질을 두려워해 1894년 6월 6일에 전주 화약을 맺고 해산해버렸다. 이로써 원칙대로면 청나라와 일본 양측 군대 모두 그대로 회군해야 했다. 따라서 조선 조정은 일본과 청나라에게 "동학농민운동은 이제 다 끝났으니 본국으로 돌아가라"고 요구했으나 6월 12일 일본군 혼성 제9여단 선발대[* 제9 혼성여단장은 오시마 요시마사(大島義昌) 소장으로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의 외고조부다.], 6월 16일 혼성 제9여단 4,000명이 제물포에 상륙했다. 이들은 6월 23일 [[한양]]으로 진군해 일부는 [[용산구|용산]]에 주둔하고 일부는 한양 시내를 진군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